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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SIMARKET COLUMN

원페 당일판 앞에서 지갑을 꺼내기까지: 개러지키트가 가르쳐준 피규어의 시간

원더 페스티벌 당일판 개러지키트는 양산 스케일 피규어와 다른 시간을 산다. 원형사의 손끝에서 태어나 이벤트장에서만 만날 수 있는 이 소량생산 레진 키트 앞에서, 우리는 "완성품을 사는 것"이 아니라 "만들 권리를 사는 것"임을 배운다. 대량생산이 지워버린 피규어 취미의 원형이 거기 있다.

원페 당일판 앞에서 지갑을 꺼내기까지: 개러지키트가 가르쳐준 피규어의 시간
Photo: elminium / CC BY

2019년 여름, 마쿠하리 메세 딜러 부스에서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원더 페스티벌(원페) 당일판 개러지키트 앞에 처음 선 날, 저는 15,000엔짜리 회색 덩어리를 사면서 울었습니다. 좋아하는 마이너 작품의 캐릭터가 1/8 스케일 레진 키트로 나왔는데, 양산 스케일로는 절대 나오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딜러 테이블 위 투명 아크릴 케이스 안에 놓인 채색 견본을 보면서, 이게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옆 부스에서는 누군가 같은 키트 5세트를 사며 "조색 실패용이요"라고 웃고 있었습니다.

그날 산 키트는 지금도 제 서랍 안에서 잠들어 있습니다. 조립 경험이 없어서 차마 손을 대지 못했거든요. 하지만 후회하지 않습니다. 원페의 당일판 문화는 "완성품을 사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지키는 것"에 가까우니까요. 양산 피규어가 상품이라면, 개러지키트는 기록입니다.

당일판권 제도가 만든 독특한 생태계

원더 페스티벌의 당일판권(当日版権) 제도는 1984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저작권자가 이벤트 당일에 한해 2차 창작물 판매를 허락하는 시스템이죠. 딜러는 행사 전에 저작권사에 신청서를 제출하고, 승인을 받으면 당일 부스에서 키트를 팔 수 있습니다. 판매 기간은 오직 그날 하루. 이벤트가 끝나면 같은 키트를 다시 팔 수 없습니다. 재판을 내려면 다음 원페에 다시 신청해야 하고요.

이 제도 덕분에 상업성이 낮은 마이너 작품이나 특정 의상 버전처럼 양산 제조사가 절대 손대지 않을 캐릭터들이 입체화됩니다. 굿스마일컴퍼니나 알터 같은 대형 제조사는 최소 수천 개 단위로 찍어야 하니 판매 예측이 불확실한 기획은 피하죠. 하지만 개인 원형사는 50개만 찍어도 됩니다. 적자를 안 보면 그만이니까요. 덕분에 원페 딜러 부스에는 20년 전 OVA 캐릭터부터 동인 게임 주인공까지, 양산 시장에서는 절대 만날 수 없는 조형들이 줄을 섭니다.

당일판이라는 이름 때문에 오해하기 쉬운데, 실제로는 사전 예약제를 병행하는 딜러가 많습니다. 트위터나 개인 사이트에서 미리 받은 예약 물량을 당일 부스에서 인도하고, 남은 재고만 현장 판매하는 식이죠. 2010년대 중반부터는 예약전쟁이 심해져서 인기 원형사의 신작은 공지 후 몇 분 안에 마감되곤 합니다. 현장에서 살 수 있는 물량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입니다.

Photo: *_* / CC BY

개러지키트는 왜 회색 덩어리로 파는가

처음 개러지키트를 본 사람들이 가장 당황하는 지점입니다. 왜 채색도 안 된 회색 파츠 덩어리를 몇만 엔씩 주고 사야 하는가. 답은 간단합니다. 레진 키트는 조립과 도색을 전제로 설계되기 때문입니다. 양산 스케일 피규어가 PVC나 ABS 같은 플라스틱 사출 성형인 반면, 개러지키트는 폴리우레탄 레진을 실리콘 몰드에 부어 만듭니다. 소량생산에 적합하지만 색이 들어간 레진을 쓰기 어렵죠.

파츠 분할도 다릅니다. 양산품은 공장 조립을 고려해 최소한의 접합으로 설계되지만, 개러지키트는 원형을 뜨기 위한 몰드 분할이 우선입니다. 그래서 머리카락이 앞머리·옆머리·뒷머리로 5~6조각 나뉘거나, 치마가 전후좌우 4파츠로 쪼개지는 경우가 흔합니다. 조립자가 순간접착제나 에폭시 퍼티로 이음새를 메우고 사포질해서 정리하는 게 기본 전제예요.

딜러 부스에 전시된 채색 견본은 대부분 원형사나 협력 도장사가 직접 완성한 것입니다. 같은 키트를 사도 본인의 조색·도장 실력에 따라 완성도가 천차만별이 되죠. 그래서 원페 현장에서는 "이거 내가 칠할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 초심자와 "클리어 파츠 주형은 어떻게 하셨어요?"라고 파고드는 고수가 같은 테이블 앞에 섭니다. 딜러는 친절하게 난이도를 설명해주곤 합니다. "초보자에게는 추천 안 해요. 파츠 18개고 이음새 처리가 까다로워요."

붉은 여왕과 앨리스 공주 1/6 무도색 레진 키트붉은 여왕과 앨리스 공주 1/6 무도색 레진 키트

원페는 어떻게 피규어 취미의 성지가 되었나

원더 페스티벌은 1984년 오쿠라 호텔에서 시작해 지금은 연 2회, 마쿠하리 메세에서 열립니다. 여름(7~8월)과 겨울(2월)로 나뉘어 각각 5만 명 이상이 찾는 세계 최대 규모의 피규어 이벤트죠. 개러지키트 딜러 부스 외에도 굿스마일·코토부키야 같은 양산 제조사 부스, 피그마·넨도로이드 신작 전시, 디오라마 작품 출품 섹션까지 모여 있습니다. 한국에서 가는 팬들은 보통 2박 3일 일정을 잡고, 이벤트 당일은 아침 개장부터 저녁까지 붙어 있습니다.

입장료는 2,500엔 안팎. 사전 등록제라 현장 판매는 없습니다. 카탈로그(공식 가이드북)는 별도 구매인데, 딜러 부스 배치도와 출품 목록이 실려 있어서 필수품입니다. 두께가 전화번호부 수준이라 들고 다니다 팔이 아픈 게 원페 참가자의 통과의례죠. 요즘은 디지털 카탈로그도 있지만, 종이책을 펼쳐놓고 동선을 연필로 그어가며 계획 세우는 맛이 또 다릅니다.

원페의 독특한 점은 "촬영 금지" 딜러 부스가 꽤 많다는 겁니다. 당일판권 특성상 저작권사가 SNS 확산을 원치 않는 경우가 있고, 원형사 본인이 도용을 우려해 촬영을 막기도 합니다. 부스 앞에 "撮影NG"(촬영 불가) 팻말이 서 있으면 카메라를 내려야 합니다. 그래서 원페 후기 글에는 "사진은 못 찍었지만 ○○ 딜러 부스의 ××가 정말 좋았다"는 식의 텍스트만 남곤 하죠.

Photo: *_* / CC BY

한국의 원호비와 비교하면 보이는 것들

한국에도 원더 페스티벌과 비슷한 행사가 있습니다. 원더 호비 갤러리(원호비)나 코믹월드의 피규어 존이 대표적이죠. 다만 일본의 당일판권 제도와 같은 시스템은 없어서, 개러지키트보다는 완성품 전시·판매 위주입니다. 국내 원형사들이 자작 피규어를 출품하거나, 해외 직구 업체들이 부스를 여는 식이죠. 규모나 딜러 수는 원페의 10분의 1 수준이지만, 교통비 없이 국내에서 피규어 문화를 체험할 수 있다는 장점이 큽니다.

원호비에 가보면 원페와 다른 풍경이 보입니다. 개러지키트 판매 부스보다 완성품 전시 부스가 많고, 방문자들도 "사려고" 오기보다 "구경하러"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격대도 다릅니다. 원페 개러지키트는 1/8 스케일 기준 12,000~20,000엔이 평균인데, 한국 행사에서는 완성품 중심이라 가격 폭이 넓습니다. 넨도로이드 5,000원부터 스케일 피규어 30만 원대까지 섞여 있죠.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한국에서는 당일판 문화가 뿌리내리기 어렵다는 겁니다. 저작권 처리 문제도 있지만, 무엇보다 개러지키트를 조립·도장할 수 있는 모델러 인구가 일본만큼 두텁지 않기 때문입니다. 원페에서 개러지키트를 사는 사람들 상당수는 건프라나 밀리터리 모형으로 단련된 도장 실력자들입니다. 한국에서는 그런 베이스가 약해서, "조립 전제 상품"이 시장을 형성하기 어렵죠.

전장의 발큐리아 DUEL 셀베리아 블레스 -한여름 2016- 1/6 완성품 피규어 [원더 페스티벌 2016 여름 한정]전장의 발큐리아 DUEL 셀베리아 블레스 -한여름 2016- 1/6 완성품 피규어 [원더 페스티벌 2016 여름 한정]

당일판 키트를 사기 전에 알아야 할 것들

원페 당일판 개러지키트를 살 때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하는 건 스케일과 파츠 수입니다. 같은 1/8이라도 원형사마다 실제 크기가 다르고, 파츠가 10개인 키트와 30개인 키트의 난이도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딜러 부스에 전시된 분해 샘플을 보거나, 직접 물어보는 게 좋습니다. "初心者向けですか?"(초보자용인가요?)라고 묻는 건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레진 재질도 중요합니다. 폴리우레탄 레진이 일반적이지만, 일부 딜러는 캐스트(석고계) 레진을 씁니다. 캐스트는 가볍고 사포질이 쉬운 대신 강도가 약해서 얇은 파츠가 부러지기 쉽습니다. 칼이나 송곳으로 살짝 긁어보면 재질을 대충 짐작할 수 있는데, 캐스트는 쉽게 가루가 납니다. 요즘은 대부분 폴리우레탄이지만, 구형 키트나 일부 저가 제품은 여전히 캐스트를 쓰기도 하죠.

가격은 복불복입니다. 인기 원형사는 같은 1/8 스케일도 20,000엔을 훌쩍 넘기고, 무명 딜러는 10,000엔 아래로 내놓기도 합니다. 비싸다고 무조건 퀄리티가 좋은 것도, 싸다고 나쁜 것도 아닙니다. 원형사의 지명도, 라이선스 비용, 파츠 복잡도, 생산 수량이 모두 가격에 영향을 주니까요. 현장에서 채색 견본을 보고 마음에 들면 사는 게 정답입니다. 다음 원페에 재판이 나올 거라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Photo: *_* / CC BY

조립 못 해도 괜찮다는 위로

고백하자면 저는 개러지키트를 10개 넘게 샀지만, 직접 완성한 건 단 한 개도 없습니다. 도장 실력이 없어서 엄두를 못 냈거든요. 조립 대행이나 도장 커미션을 맡기는 방법도 있지만, 비용이 키트 값의 2~3배는 나가서 망설여졌습니다. 그래도 후회는 안 합니다. 서랍 속 미조립 키트를 꺼내 파츠를 하나씩 만져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우니까요. 원형사가 어느 부분을 분할했는지, 디테일을 어떻게 새겨 넣었는지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원페 커뮤니티에서는 "적층(積層)"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사놓고 안 만드는 키트가 쌓여간다는 뜻이죠. "적층 5년 차입니다"라고 농담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조립 못 한다고 자책할 필요 없다는 얘기입니다. 양산 피규어 수집이 완성품을 소유하는 취미라면, 개러지키트 수집은 가능성을 모으는 취미에 가깝습니다. "언젠가 칠할 수 있을 때"를 기다리는 시간도 취미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일부 수집가는 아예 미조립 상태 그대로 전시합니다. 투명 케이스에 회색 파츠를 늘어놓고, 옆에 딜러 명함이나 원페 카탈로그 해당 페이지를 함께 두는 식이죠. "이 키트는 2015년 여름 원페에서 ○○ 원형사가 30세트 한정으로 판 거예요"라는 설명을 붙여놓으면,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 자료가 됩니다. 완성품 피규어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시간의 무게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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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제품과 싸우는 당일판의 그늘

원페 당일판 문화에도 어두운 면이 있습니다. 무판권 복제 키트 문제입니다. 인기 원형사의 키트를 허락 없이 복제해서 파는 업자들이 있거든요. 주로 중국발 복제품인데, 원본보다 30~40% 싼 가격에 유통됩니다. 겉보기에는 구분이 어렵지만, 파츠 두께나 디테일 선명도를 자세히 보면 차이가 납니다. 원본은 섬세한 머리카락 조각 하나하나가 날카로운 반면, 복제품은 몰드가 뭉개져 있죠.

복제품을 사는 건 원형사의 노동을 훔치는 행위입니다. 당일판 키트는 수십 세트 팔아야 원형 제작비를 겨우 건지는 구조라, 복제품이 돌면 딜러 본인이 직접 손해를 봅니다. 실제로 복제 피해가 심해져서 활동을 중단한 원형사들도 있습니다. 2000년대 중반 유명했던 ○○공방이 복제 문제로 은퇴 선언을 했던 사건은 지금도 커뮤니티에서 회자됩니다.

복제품을 피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원페나 공인된 이벤트 현장에서, 딜러 본인에게 직접 사는 것입니다. 온라인 구매는 신중해야 하는데, 특히 야후옥션 같은 중고 플랫폼에서 "당일판 키트"로 검색하면 복제품이 섞여 나옵니다. 정가보다 지나치게 싸거나, 판매자가 같은 키트를 여러 세트 올린 경우는 의심해봐야 합니다. 원형사 본인이 공식 SNS에서 "재판 없음" 공지를 했는데 온라인에 재고가 넘쳐난다면, 그건 거의 복제품이라고 봐도 됩니다.

자주 묻는 질문

원페 당일판 키트를 한국에서 살 수 있나요?

원페 이벤트장에서만 판매되므로 직접 방문이 원칙입니다. 일부 대행 서비스나 지인 부탁으로 구하는 경우도 있지만, 인기 딜러 키트는 현장에서도 조기 품절되어 대행도 쉽지 않습니다. 온라인 중고 거래로 구할 수는 있으나 프리미엄이 붙고 복제품 위험도 있어, 가능하면 본인이 직접 참가하는 걸 권합니다. 항공권과 입장료를 합쳐도 피규어 취미를 깊이 이해하는 데는 그만한 투자 가치가 있습니다.

조립·도장 경험이 전혀 없어도 개러지키트를 살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다만 완성까지 가려면 학습 곡선이 가파릅니다. 건프라 HG급 조립 경험이 있다면 단순한 키트부터 도전해볼 만하고, 전혀 경험이 없다면 조립 대행이나 커미션 도장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비용은 키트 값의 2~4배 수준이지만, 좋아하는 캐릭터가 양산으로는 나오지 않는다면 유일한 선택지일 수 있습니다. 미조립 상태로 소장하는 것 역시 하나의 즐기는 방식입니다.

당일판 키트의 저작권은 어떻게 처리되나요?

원더 페스티벌 주최 측이 각 저작권사와 사전 계약을 맺고, 딜러는 행사 전에 출품 신청서를 제출해 승인받습니다. 승인되면 이벤트 당일에만 판매할 수 있고, 행사 종료 후에는 같은 키트를 재판매할 수 없습니다. 재판을 원하면 다음 원페에 다시 신청해야 하죠. 이 시스템 덕분에 상업성 낮은 마이너 작품도 합법적으로 입체화될 수 있으며, 저작권사는 소액의 라이선스 비용을 받습니다.

원페에 가면 꼭 봐야 할 부스는 어디인가요?

개인 취향에 따라 다르지만, 굿스마일컴퍼니 기업 부스는 신작 프로토타입을 가장 먼저 공개하는 곳이라 필수 코스입니다. 개러지키트 딜러 중에는 20년 넘게 활동한 老舗(노포) 딜러들이 있는데, 이들의 부스는 카탈로그에서 리스트를 미리 확인하고 찾아가는 게 좋습니다. 디오라마 출품 섹션도 놓치지 마세요. 개인 모델러들이 수백 시간 들여 만든 정밀 작품을 무료로 감상할 수 있으니까요. 아침 일찍 입장해 기업 부스 신작 촬영 후, 오전에 딜러 부스 쇼핑, 오후에 천천히 출품작 구경하는 게 정석 동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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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페 당일판 앞에서 지갑을 꺼낼 때, 우리는 완성품이 아니라 시간을 삽니다. 원형사가 몇 달 동안 깎고 다듬은 시간, 이벤트장까지 찾아온 내 시간, 그리고 언젠가 붓을 들고 색을 칠할 미래의 시간. 회색 레진 덩어리는 그 모든 시간이 응축된 가능성입니다. 양산 피규어의 완결된 아름다움도 좋지만, 개러지키트가 품은 미완의 설렘도 이 취미를 지탱하는 한 축이라고 믿습니다. 오늘도 여러분의 유리장에 좋은 인연이 닿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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